프란스 베르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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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스 베르발트는 1796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스웨덴의 작곡가이다. 그는 4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으며,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정형외과 의사로도 활동했다. 베를린에서 정형외과 클리닉을 운영하며 작곡을 중단했다가 빈으로 이주하여 교향곡 4곡을 완성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스웨덴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재평가되어 스웨덴의 중요한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4개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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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베르발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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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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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란츠 아돌프 베르발트 |
출생 | 1796년 7월 23일 |
출생지 | 스웨덴 스톡홀름 |
사망 | 1868년 4월 3일 (향년 71세) |
사망지 | 스웨덴 스톡홀름 |
직업 | |
직업 |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
음악 장르 | |
장르 | 클래식 음악 낭만주의 음악 |
악기 | 바이올린 |
2. 생애
베르발드는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으며, 4대에 걸쳐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다.[1] 그의 아버지인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는 어린 프란츠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그는 곧 콘서트에 출연했다. 1811년 칼 13세가 권력을 잡고 왕립 예배당을 복원하자, 이듬해 베르발드는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궁정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에두아르 뒤 퓌에게 레슨을 받았으며 작곡도 시작했다. 여름은 오케스트라의 비수기였고, 베르발드는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러시아 제국을 여행했다. 그 시기의 작품으로는 셉텟과 세레나데가 있는데,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이 작품들을 가치 있는 음악으로 여겼다.
1818년 베르발드는 ''Musikalisk journal''(음악 저널)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Journal de musique''(음악 저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잡지에는 여러 작곡가의 쉬운 피아노 작품과 노래, 그리고 그의 오리지널 작품도 실렸다. 1821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의 형제 아우구스트에 의해 초연되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고, 청중 중 일부는 느린 악장 동안 웃음을 터뜨렸다.[1]
1825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가족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베르발드는 여러 장학금을 받으려 했지만, 국왕으로부터 단 하나의 장학금만 받았고, 이로 인해 베를린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무대에 올릴 기회도 없이 오페라에 몰두했다. 생계를 위해 베르발드는 1835년 베를린에서 정형외과 및 물리 치료 클리닉을 시작했고, 이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가 발명한 정형외과 장치 중 일부는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베를린 시대에 베르발드는 작곡을 그만두었고, 1841년 빈으로 이주하여, 마틸데 셰러(Mathilde Scherer)와 결혼했다. 1842년 빈 레두텐잘의 연주회에서 연주된 자작의 교향시가 절찬을 받으면서, 베르발드는 그 후 3년 이상을 들여, 4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교향곡 1번 사단조 "장중한(Serieuse)"은, 베르발드의 생전에 초연된 유일한 교향곡으로, 1843년 사촌 요한 프레데릭의 지휘로, 궁정 가극장 관현악단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연주회에서는, 베르발드의 오페레타 "수도원 참배(Jag gar i kloster)"도 연주되었지만, 그 성공은 예니 린드의 덕분으로 여겨지고 있다.[2] 1846년, 린드는 베르발트의 칸타타 중 하나에서 노래했다.[2] 또 다른 오페레타인 ''모디스트''는 1845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베르발드의 작품은, 스웨덴에서는 작곡가의 생전에는 이해받지 못했고, 신문상의 평론에 적대심조차 불러일으켰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좀 더 나았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은 1847년 베르발드를 명예 회원으로 추가했다.
베르발드는 1849년 스웨덴으로 귀국했지만, 귀국해도 음악가로서 제대로 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이듬해, 그의 친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루드비그 페트레(Ludvig Petré)의 주선으로, 옹에르만란드 지방의 북쪽에 있는 산데(Sandö)라는 작은 마을의 유리 공장 매니저가 되었다. 또한, 거기서 매니지먼트 센스를 발휘했기 때문에, 1853년에는 공동 경영자가 되었고, 같은 마을의 제재소의 이해 관계자도 되었다. 이 기간의 베르발드는, 여름 동안은 거의 산데에서 지냈고, 겨울은 스톡홀름에서 작곡에 전념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실내악이 중심이었고, 1849년부터 1851년에 걸쳐 3개의 피아노 삼중주곡 (제1번 내림 마장조, 제2번 바단조, 제3번 라단조), 1853년에는 피아노 오중주곡 (제1번 다단조)과 피아노 삼중주곡 (제4번 다장조)을 작곡했다. 1855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를 완성했고, 베르발드에게 발탁되어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여성 피아니스트 에게 헌정되었다. 1857년에는 피아노 오중주곡 (제2번 가장조)을 작곡했고, 이는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는 첼로와 피아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곡 등을 작곡했고, 이러한 실내악 작품의 대부분은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베르발드의 오페라 중, 생전에 상연된 것은 몇 안 되지만, 그 중 하나인 "소리아의 에스트렐라"는 1862년 4월 궁정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크게 갈채를 받았고, 같은 달 안에 4회 추가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 성공에 이어 "골콘다의 여왕('Drottningen av Golconda")"이 작곡되었고, 1864년에 상연될 예정이었지만, 궁정 가극장의 감독자 교체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1867년,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그동안 그의 지원을 거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초 응모에서 무려 22년이 경과했다), 죽기 직전에 베르발드를 스톡홀름 음악원의 작곡과 기악 교수로 임명했다. 1864년 투표에서 부결되었고, 3년 후에 다시 부결되었지만, 임명된 헤르만 베렌스가 베르발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사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무렵에는 에 의한 스웨덴어 찬송가 개정 등 중요한 의뢰가 들어왔지만, 찬송가집은 제5집까지 59곡이 완성되었을 뿐이며, 그것을 완수할 수 있을 만큼의 수명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베르발드는 1868년 4월 3일 스톡홀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스톡홀름 북쪽 인접 도시인 솔나에 있는 북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 장례식에서는 그의 교향곡 제1번에서 제2악장이 연주되었다.
베르발트가 사망한 지 10년 후인 1878년, 그의 교향곡 4번 E-플랫 장조, "''Naïve''"(나이브)가 초연되었다(원래 1848년 파리 초연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러나 작곡에서 초연까지의 이 간격은 교향곡 2번 D장조, "''Capricieuse''"(카프리치에즈) 및 교향곡 3번 C장조, "''Singulière''"(생귤리에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았다. 이 두 곡은 각각 1914년과 1905년에 초연되었다.
스웨덴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울프 비외를린은 EMI 클래식 레이블로 베르발트의 다양한 작품을 녹음했다.
2. 1. 초기 생애와 음악 활동 (1796-1828)
베르발드는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으며, 4대에 걸쳐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다.[1] 그의 아버지인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는 어린 프란츠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그는 곧 콘서트에 출연했다. 1811년 칼 13세가 권력을 잡고 왕립 예배당을 복원하자, 이듬해 베르발드는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궁정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에두아르 뒤 퓌에게 레슨을 받았으며 작곡도 시작했다.[1] 여름은 오케스트라의 비수기였고, 베르발드는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러시아 제국을 여행했다. 그 시기의 작품으로는 셉텟과 세레나데가 있는데,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이 작품들을 가치 있는 음악으로 여겼다.1818년 베르발드는 ''Musikalisk journal''(음악 저널)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Journal de musique''(음악 저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잡지에는 여러 작곡가의 쉬운 피아노 작품과 노래, 그리고 그의 오리지널 작품도 실렸다. 1821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그의 형제 아우구스트에 의해 초연되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고, 청중 중 일부는 느린 악장 동안 웃음을 터뜨렸다.[1]
1825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가족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베르발드는 여러 장학금을 받으려 했지만, 국왕으로부터 단 하나의 장학금만 받았고, 이로 인해 베를린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무대에 올릴 기회도 없이 오페라에 몰두했다. 생계를 위해 베르발드는 1835년 베를린에서 정형외과 및 물리 치료 클리닉을 시작했고, 이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가 발명한 정형외과 장치 중 일부는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되었다.
베를린 시대에 베르발드는 작곡을 그만두었고, 1841년 빈으로 이주하여, 마틸데 셰러(Mathilde Scherer)와 결혼했다. 1842년 빈 레두텐잘의 연주회에서 연주된 자작의 교향시가 절찬을 받으면서, 베르발드는 그 후 3년 이상을 들여, 4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2. 2. 베를린 시기 (1829-1841)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베르발드는 4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궁정 가극장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811년 칼 13세가 왕립 예배당을 복원하자, 이듬해 베르발드는 그곳에서 일하며 에두아르 뒤 퓌에게 배우고 작곡을 시작했다.[1] 여름에는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러시아 제국을 여행했다. 이 시기 작품 중 셉텟과 세레나데는 만년에도 가치 있게 여겼다.1818년 베르발드는 ''Musikalisk journal''(음악 저널)을 출판(후에 ''Journal de musique''로 변경)하여 자신의 작품을 포함한 여러 작곡가의 쉬운 피아노 작품과 노래를 실었다.[1] 1821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동생 아우구스트에 의해 초연되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1]
182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베르발드는 여러 장학금을 받으려 했으나 국왕으로부터 단 하나의 장학금만 받았다. 이 장학금으로 베를린에서 공부하며 오페라에 몰두했지만, 무대에 올릴 기회는 없었다. 1835년 베를린에서 정형외과 및 물리 치료 클리닉을 시작하여 생계를 유지했고, 이는 수익성이 좋았다. 그가 발명한 정형외과 장치 중 일부는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되었다.
2. 3. 빈 시기와 작곡 활동의 재개 (1841-1849)
베르발드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작곡을 중단했다가, 1841년 빈으로 이주하고 마틸데 셰러와 결혼한 후 작곡 활동을 재개했다.[1] 1842년, 호프부르크 왕궁의 레두텐잘에서 열린 그의 톤 시 콘서트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이후 3년 동안 베르발트는 4개의 교향곡을 썼다.[1] 이 시기 작곡된 교향곡 1번 G단조 "''Sérieuse''"(세리에즈)는 베르발트가 생전에 연주된 그의 4개의 교향곡 중 유일한 작품이었다.[1] 1843년, 그의 사촌 요한 프레드릭이 왕립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스톡홀름에서 초연되었다.[1] 같은 콘서트에서 그의 오페레타 ''Jag går i kloster''('수도원에 들어간다')도 공연되었는데, 예니 린드가 역할을 맡아 노래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2] 1846년, 린드는 베르발트의 칸타타 중 하나에서 노래했다.[2] 또 다른 오페레타인 ''모디스트''는 1845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47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은 그를 명예 회원으로 추대했다.[3]1849년 베르발트는 스웨덴으로 돌아왔지만, 귀국해도 음악가로서 제대로 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1] 그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루드비그 페트레가 소유한 Ångermanland의 Sandö에서 유리 공장을 운영했다.[1] 그 기간 동안 베르발트는 실내악 제작에 집중했다.
2. 4. 스웨덴 귀국과 말년 (1849-1868)
베르발드는 1849년 스웨덴으로 귀국하여,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루드비그 페트레가 소유한 옹에르만란드 지방의 Sandö 유리 공장을 운영했다.[4] 이 기간 동안 베르발트는 실내악 제작에 집중했다. 1849년부터 1851년에 걸쳐 3개의 피아노 삼중주곡 (제1번 내림 마장조, 제2번 바단조, 제3번 라단조), 1853년에는 피아노 오중주곡 (제1번 다단조)과 피아노 삼중주곡 (제4번 다장조)을 작곡했다. 1855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를 완성했고,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여성 피아니스트 Hilda Thegerströmsv에게 헌정되었다. 1857년에는 피아노 오중주곡 (제2번 가장조)을 작곡했고, 이는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1850년대 후반에는 첼로와 피아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곡 등을 작곡했고, 이러한 실내악 작품의 대부분은 독일에서 출판되었다.그의 몇 안 되는 오페라 중 생전에 무대에 올려진 ''에스트렐라 데 소리아''는 1862년 4월 왕립 극장에서 초연되어 열렬한 갈채를 받았고, 같은 달에 4번 더 공연되었다. 이 성공에 이어 ''골콘다의 여왕''을 썼는데, 1864년에 초연될 예정이었지만 왕립 오페라의 감독 교체로 인해 무산되었다.
1866년 베르발트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스웨덴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4] 이듬해 왕립 음악 아카데미 이사회는 베르발트를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 작곡 교수로 임명했지만,[4] 며칠 후 음악원 이사회가 결정을 번복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했다. 왕가는 개입했고, 베르발트가 그 자리를 얻었다. 그 무렵 그는 또한 많은 중요한 의뢰를 받았지만, 그것을 모두 완수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4]
베르발드는 1868년 폐렴으로 스톡홀름에서 사망했으며, 그곳 노라 베그라브닝스플라첸 (북부 묘지)에 묻혔다.[4] 교향곡 1번의 2악장이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4]
3. 주요 작품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69년 저서 『빈 연주회 역사(Geschichte des Concertwesens in Wien)』에서 베르발트에 대해 "인품은 자극적이고 기지가 넘치지만, 기발한 면이 있었다. 작곡가로서는 창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다"라고 밝혔다. 반면, 베르발트 사후 작곡가 루드비히 노르만, 토르 아울린, 빌헬름 스텐함마르 등이 베르발트 작품의 보급에 힘썼기 때문에, 베르발트가 스웨덴의 "가장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빌헬름 페테르손-베리에르 저, 『Dagens nyheter』)로 이해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칼 닐센은 베르발트에 대해 "미디어와 돈, 권력은 훌륭한 예술을 해치거나 도울 수 없다. 그런 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전진하고 창작하며 일어서는 성실하고 제대로 된 예술가들에게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스웨덴에 그 최고의 예가 있다. 베르발트다."라고 말했다.
베르발트의 죽음 10년 후, 교향곡 4번 내림 마장조 "소박한 교향곡"( "Naive")이 1878년에 초연되었다. 원래 1848년에 파리 초연 계획이 있었지만, 1848년 혁명 때문에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두 곡, 교향곡 2번 라장조 "[교향곡 2번 (베르발트)|변덕스러운 교향곡]"( "Capriceuse")과 교향곡 3번 다장조 "별난 교향곡"( "Singuliere")에 비하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이 두 곡은 20세기까지 초연되지 않았다.
- 교향곡 1번 사단조 "진지한 교향곡" (Sinfonie sérieuse)
- 교향곡 2번 라장조 "변덕스러운 교향곡" (Sinfonie capricieuse)
- 교향곡 3번 다장조 "별난 교향곡" (Sinfonie singulière)
- 교향곡 4번 내림 마장조 "소박한 교향곡" (Sinfonie naïve, 악보에는 표제가 없음)
-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
- 대 칠중주 내림 나장조
- 현악 사중주 사단조 외
- 피아노 오중주, 피아노 삼중주
- 바순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bassoon Konzertstuck)
3. 1. 교향곡
베르발트는 A장조 교향곡(단편)(1820), 교향곡 1번 사단조 ''Sinfonie sérieuse''(1842), 교향곡 2번 라장조 ''Sinfonie capricieuse''(1842), 교향곡 3번 다장조 ''Sinfonie singulière''(1845), 교향곡 4번 내림 마장조 ''Sinfonie naïve''(1845)를 작곡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69년 저서 『빈 연주회 역사(Geschichte des Concertwesens in Wien)』에서 베르발트에 대해 "인품은 자극적이고 기지가 넘치지만, 기발한 면이 있었다. 작곡가로서는 창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다"라고 밝혔다. 반면, 베르발트 사후 작곡가 루드비히 노르만, 토르 아울린, 빌헬름 스텐함마르 등이 베르발트 작품의 보급에 힘썼기 때문에, 베르발트가 스웨덴의 "가장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빌헬름 페테르손-베리에르 저, 『Dagens nyheter』)로 이해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칼 닐센은 베르발트에 대해 "미디어와 돈, 권력은 훌륭한 예술을 해치거나 도울 수 없다. 그런 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전진하고 창작하며 일어서는 성실하고 제대로 된 예술가들에게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스웨덴에 그 최고의 예가 있다. 베르발트다."라고 말했다.베르발트의 죽음 10년 후, 교향곡 4번 내림 마장조 "소박한 교향곡"( "Naive")이 1878년에 초연되었다. 원래 1848년에 파리 초연 계획이 있었지만, 1848년 혁명 때문에 연기되었다. 교향곡 2번 라장조 "변덕스러운 교향곡"( "Capriceuse")과 교향곡 3번 다장조 "별난 교향곡"( "Singuliere")은 20세기까지 초연되지 않았다.
3. 2. 협주곡
-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주제와 변주, 내림 나장조 (1816)
- 바이올린 2중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817)
- 올림 다단조 바이올린 협주곡 (1820)
- 바순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바장조 (1827)
-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 (1855)
3. 3. 기타 관현악 작품
베르발드는 '''라이프치히 전투'''(Slaget vid Leipzig, 1828), '''엘펜슈필'''(Elfenspiel, 1841), '''진지하고 유쾌한 변덕'''(Ernste und heitere Grillen, 1842), '''노르웨이 알프스에 대한 추억'''(Erinnerung an die norwegischen Alpen, 1842), '''바야데르 축제'''(Bayaderen-Fest, 1842), '''경주'''(Wettlauf, 1842)와 같은 교향시를 작곡했다. 내림 마 장조 푸가(Fugue in E flat, 1841), '''대 폴로네이즈'''(Stor polonaise, 1843)도 작곡했다.3. 4. 실내악
프란스 베르발드는 다양한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2중주 D장조(1857–60), 첼로(또는 바이올린)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B 플랫 장조(1858),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듀오 콘체르탄테 A장조(1816)를 작곡했다. 피아노 삼중주 C장조(1845), 피아노 삼중주 1번 E 플랫 장조(1849), 피아노 삼중주 2번 F 단조(1851), 피아노 삼중주 3번 D 단조(1851), 피아노 삼중주 4번 C장조(1853)를 작곡했다. 현악 사중주 1번 G 단조(1818), 현악 사중주 2번 A 단조(1849), 현악 사중주 3번 E 플랫 장조(1849)를 작곡했다. 피아노, 클라리넷, 호른, 바순을 위한 사중주 E 플랫 장조(1819), 피아노 오중주 1번 C 단조(1853), 피아노 오중주 2번 A장조(1850–57), 클라리넷, 호른, 바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를 위한 셉테트 B 플랫 장조(1828) 외에 다양한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69년 저서 『빈 연주회 역사(Geschichte des Concertwesens in Wien)』에서 베르발트에 대해 "인품은 자극적이고 기지가 넘치지만, 기발한 면이 있었다. 작곡가로서는 창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다"라고 밝혔다.3. 5. 성악 작품
- ''경사스러운 행사를 위한 칸타타'' (1821)
- ''테너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세레나데'' (1825)
- ''스웨덴으로의 황태자비 도착과 고귀한 결혼을 기념하여 쓰여진 칸타타'' (1823)
- ''뤼첸 전투에서의 구스타브 아돌프 대왕의 승리와 죽음'' (1845)
- ''북유럽 환상곡'' (1846)
- ''달라나로의 구스타프 바사의 여정'' (1849)
- ''아포테오스'' (1864)
- 기타 합창 작품 및 가곡
3. 6. 무대 작품
- ''레오니다''(Leonida), 오페라 (1829, 분실)
- ''수도원에 들어가다(Jag går i kloster)'', 오페레타 (1843; 초연 1843)
- ''모드 상인(Modehandlerskan)'', 오페레타 (1843; 초연 1845)
- ''스웨덴의 시골 약혼 축제''(Ein ländliches Verlobungsfest in Schweden), 칸타타 (1847)
- ''소리아의 별(Estrella de Soria)'', 오페라 (1841/48)
- ''골콘다의 여왕(Drottningen av Golconda)'' (''골콘다의 여왕''), 오페라 (1864)
3. 7. 관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69년 저서 『빈 연주회 역사(Geschichte des Concertwesens in Wien)』에서 베르발트에 대해 "인품은 자극적이고 기지가 넘치지만, 기발한 면이 있었다. 작곡가로서는 창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다"라고 밝혔다. 반면, 베르발트 사후 작곡가 루드비히 노르만, 토르 아울린, 빌헬름 스텐함마르 등이 베르발트 작품의 보급에 힘썼기 때문에, 베르발트가 스웨덴의 "가장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빌헬름 페테르손-베리에르 저, 『Dagens nyheter』)로 이해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칼 닐센은 베르발트에 대해 "미디어와 돈, 권력은 훌륭한 예술을 해치거나 도울 수 없다. 그런 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전진하고 창작하며 일어서는 성실하고 제대로 된 예술가들에게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스웨덴에 그 최고의 예가 있다. 베르발트다."라고 말했다.베르발트의 죽음 10년 후, 교향곡 4번 내림 마장조 "소박한 교향곡"("Naive")이 1878년에 초연되었다. 원래 1848년에 파리 초연 계획이 있었지만, 1848년 혁명 때문에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두 곡, 교향곡 2번 라장조 "변덕스러운 교향곡"("Capriceuse")과 교향곡 3번 다장조 "별난 교향곡"("Singuliere")에 비하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이 두 곡은 20세기까지 초연되지 않았다.
- ''행진곡-리뷰''
- 교향곡 1번 사단조 "진지한 교향곡" (Sinfonie sérieuse)
- 바순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bassoon Konzertstuck)
-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
4. 평가 및 영향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69년 저서 ''빈의 콘서트 사업의 역사''에서 베르발트에 대해 "자극적이고 재치 있으며 기이한 면이 있지만, 작곡가로서 창작력과 상상력이 부족했다"고 평했다.[5] 반면, 작곡가 루드비그 노르만, 토르 아울린, 빌헬름 스텐함마르는 베르발트의 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르발트는 빌헬름 페테르손-베르거가 스톡홀름 신문 ''다겐스 뉘헤테르''에 기고한 글에서 "스웨덴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로 인정받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5]
1911년, 칼 닐센은 베르발트에 대해 "어떤 언론, 돈, 권력도 훌륭한 예술을 훼손하거나 이롭게 할 수 없다. ... 스웨덴에는 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가 있다. 바로 베르발트이다."라고 썼다.[5] 영국의 음악학자 로버트 레이턴(음악학자)은 1959년에 베르발트에 대한 유일한 영문 전기를 썼으며, 다른 저서에서도 베르발트의 음악에 대해 상세하게 논했다.[5]
해럴드 트러스콧은 하버갈 브라이언의 ''고딕'' 교향곡 분석에서 베르발트를 "소나타 스타일을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이상한 짓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항상 논리적이었지만 놀라웠고, 소나타의 형태와 표현을 방해하기보다는 도왔다"라고 평했다.
베르발트의 내림 마장조 현악 사중주에 대해 폴 그리피스(작가)는 "새로운 형식적 형태의 성취는 ...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6]
참조
[1]
간행물
programme notes for Naxos CD 8.554287, Swedish Romantic Violin Concertos
[2]
서적
Greene's Biographical Encyclopedia of Composers
Reproducing Piano Roll Foundation
[3]
웹사이트
Swedish Musical Heritage - Franz Berwald
https://www.swedishm[...]
[4]
웹사이트
Berwald: Symphonies Nos. 1 and 2
https://www.naxos.co[...]
[5]
문서
Notes to Franz Berwald, Chamber Music
https://www.hyperion[...]
1997
[6]
서적
The String Quartet: A History
Thames & Hudson
[7]
웹사이트
Franz Berwald (1796-1868)
https://www.swedish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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